금천 독립운동의 발자취를 찾는여정은, 금천 지역의 독립운동 역사와 금천 독립유공자들의 발자취와 함께 한다. 금천구는 조선시대에는 금천현(1795년부터 시흥현)의 관아가 있었던 중심지였고, 1895년 시흥군으로 승격, 1910년까지 시흥 군청이 있었다. 하지만, 1914년 다시 일제에 의해 행정 통폐합이 이루어지고, 이후 수많은 행정구역의 분리를 거치며 1963년 서울시로 편입되면서 금천구의 역사 또한 흩어지고 나누어졌다. 때문에 금천의 역사를 다룰 때는 현재의 금천 지역으로만 한정 짓는 것은 한계가 있다. 따라서 금천 독립운동의 발자취를 찾는이 글도 당시의 금천, 경기도 시흥군의 범위로 정리하였음을 밝혀 둔다. <필자주>


금천 지역의 3.1운동은 시흥보통학교의 동맹휴학과 만세시위로 시작되어 시흥군 전역으로 퍼져 나갔다. 327, 28일  지금의 광명시인 노온사리 만세시위에 이어 330일에는 수암면(현재 안산시)에서 주민 2천명이 모여 만세시위를 벌였으며, 군자면(현재 시흥시 거모동, 군자동 일대)에서도 만세시위가 있었다.

 

군자면 만세운동

44일 군자면에서는 329일 만세시위가 있고 난 뒤 이날 다시 거모리 면사무소와 경찰관 주재소 부근에 수백 명의 주민이 집결하여 만세운동을 펼쳤다. 군자면 만세시위로 독립유공자 포상을 받은 독립유공자는 강은식 선생, 권희 선생, 김천복 선생, 장수산 선생으로 당시 20,30대 청년들이었다.

강은식 선생은 만세운동에 참여하여 옥고를 치렀으며, 권희 선생은 ‘47일 군자면 구장터에서 독립만세시위를 한다는 격문을 작성해 돌리다 체포되어 옥고를 치렀다. 김천복 선생은 죽률리 주민들을 이끌고 만세시위에 참여했다가 옥고를 치렀다. 장수산은 권희 선생과 함께 격문을 동리 구장들에게 작성하여 돌리다 체포되었다.

오현애/금천문화역사포럼교육나눔협동조합

 

 

저작권자 © 마을신문 금천in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