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천 독립운동의 발자취를 찾는여정은, 금천 지역의 독립운동 역사와 금천 독립유공자들의 발자취와 함께 한다. 금천구는 조선시대에는 금천현(1795년부터 시흥현)의 관아가 있었던 중심지였고, 1895년 시흥군으로 승격, 1910년까지 시흥 군청이 있었다. 하지만, 1914년 다시 일제에 의해 행정 통폐합이 이루어지고, 이후 수많은 행정구역의 분리를 거치며 1963년 서울시로 편입되면서 금천구의 역사 또한 흩어지고 나누어졌다. 때문에 금천의 역사를 다룰 때는 현재의 금천 지역으로만 한정 짓는 것은 한계가 있다. 따라서 금천 독립운동의 발자취를 찾는이 글도 당시의 금천, 경기도 시흥군의 범위로 정리하였음을 밝혀 둔다. <필자주>


항일독립운동은 3.1운동 이후에도 1945년 광복 때까지 끈질기게 이루어졌으며 국내외를 가리지 않고 다양한 방식으로 계속되었다. 이 시기의 독립운동가는 윤충식 선생과 조종국 선생, 이재현 선생, 박시창 선생이다.

윤충식 선생은 신간회와 중앙청년동맹에서 활동하였으며, 1930년 광주학생운동 때 격문을 배포하다 체포되었다.

조종국 선생은 1943년 단파 송수신기를 제작하여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선전방송과 임시정부 구미위원부 방송을 청취, 국내 정치지도자들에게 제공하다 체포되어 옥고를 치렀다.

이재현 선생은 1939년 한국청년전지공작대 간부, 중국 태행산지구 유격대를 지휘했으며 1940년 광복군이 창설됨에 따라 제5지대 간부로 활동하였으며 1944년에는 한미합작훈련인 OSS훈련 무전반에서 교관을 맡았으며 1945년 국내 정진군의 본부요원이 되어 국내 침투공작 활동을 위하여 대기하던 중, 광복을 맞이하였다.

박시창 선생은 부친을 따라 중국으로 망명하여 1943년부터는 광복군 총사령부에서 고급참모로 활동하였으며, 8·15 독립 후 장군은 광복군 상해지대장으로 복무하며 일본군에 강제 동원된 한인청년들을 광복군에 편입할 수 있도록 힘썼으며 이들을 무사히 귀국시키는 데 큰 공헌을 하였다. 귀국 후 국군에 입대하여 6·25전쟁에 참전하였으며, 육군 소장으로 예편하였다. 20079월 이달의 독립운동가로 선정되었다.

 

경기도 시흥군의 독립유공자 소개를 끝으로 총 16회에 걸쳐 금천의 항일 독립운동의 발자취를 간략하게나마 살펴보았다. 흩어진 자료를 찾아 보완하여 좀 더 체계적인 정리를 할 필요가 있다. 이 논고가 그 시작이 되었을 것으로 기대하며, 금천문화역사포럼에서는 이 자료를 모아 자료집으로 발간할 예정이다. <>

오현애/금천문화역사포럼교육나눔협동조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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